니케아 공의회 | 세속의 지도자가 개입한 기독교 회의
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회의 감독들을 소집한 이유는?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는 서아시아에 위치했던 도시 니케아(Nicaea, 현 튀르키예의 이즈니크)에서 동∙서방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개최한 기독교회의를 말한다. ‘니케아 종교회의’라고도 한다. 공의회(公議會)는 교회의 교리와 규율 등을 논의하고 규정하는 공식 회의를 말하는데,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 진행된 공의회를 통해 정통과 이단이 갈렸다.
목차
1. 니케아 공의회 개요
2.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배경
– 파스카(유월절) 논쟁: 동∙서방 교회의 불필요한 논쟁
– 아리우스 논쟁: 알렉산드리아교회 장로의 불경한 주장
3.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로마 황제의 정치 전략
4.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결과와 폐단
– 유월절은 지우고 부활절 날짜는 변경
– 아리우스파 이단 규정과 추방
니케아 공의회 개요
니케아 공의회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니케아 공의회’ 하면 대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가리킨다. 니케아 공의회의 특징은 두 차례 모두 교회 지도자가 아닌 세속의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열렸다는 것이다. 제1차는 325년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가 여러 논쟁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기독교를 봉합하기 위해 개최했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787년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Constantinos Ⅵ)가 섭정 중이던 모후 이레네(Irene, 이리니)의 영향을 받아 소집했다. 이레네는 훗날 아들의 눈을 뽑고 폐위시킨 후 황제 자리에 오를 만큼 잔혹했는데, 니케아 공의회에서 전임 황제였던 레오 3세(Leo III)에 의해 금지되었던 성상 숭배를 합법화했다. 성상(Icon)이란 예수나 마리아, 성인으로 추대된 인물 등의 조각이나 그림을 말한다. 서방의 프랑크 교회에서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의를 우상 숭배의 부활이라며 비판했다. 성상 숭배는 성경적으로도 위배되는 것이다(출애굽기 20:4~6).
니케아 공의회는 최초의 기독교 회의로 알려져 있으나 사도행전에 따르면 교회 내에서 불거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미 바울을 비롯한 사도와 장로 등 교회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회의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회의는 안디옥 교회의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주신 새 언약의 율법(그리스도의 율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모세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논란을 일으켜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과 격렬한 논쟁 끝에 중재를 요청해 진행되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회의를 통해 이방인 신자들을 위해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는 것 외에 아무 짐도 지우지 않는 것이 성령의 뜻이라고 결정했다(사도행전 15:19~29).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배경
파스카(유월절) 논쟁: 동∙서방 교회의 불필요한 논쟁
2세기 초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는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유월절(성력 1월 14일 저녁)이 아닌 부활절에 성찬식을 행하기 시작했다. 성찬식이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예식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 유월절에 성찬식을 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서방 교회의 감독들은 서로 상충된 의견으로 논쟁을 벌였다. ‘파스카 논쟁(Paschal Controversies)’이라 알려진 사건이 그것이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카르포스(Polycarpos, 폴리캅)가 A.D. 155년경 로마를 방문했을 때 로마교회의 감독(오늘날의 교황) 아니케투스(Anicetus)에게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승대로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설득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A.D. 197년경 아니케투스보다 영향력이 컸던 로마교회 감독 빅토르 1세(Victor Ⅰ)가 부활절에 성찬을 행하도록 모든 교회에 강요하면서 에베소교회 감독 폴리크라테스(Polycrates)와 쟁론했다.
파스카 논쟁은 성찬식 날짜가 쟁점이었는데 사실상 논쟁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미 성찬식을 거행하는 날짜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방 교회의 감독들이 말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성찬식을 행하는 본을 보여주셨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7~20)

성경, 예수님의 가르침, 초대교회 사도들의 관습, 사도들의 전통을 이은 감독들의 증언 등 성찬식을 행하는 날짜에 대해 명백한 근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논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파스카 논쟁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결국 니케아 공의회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아리우스 논쟁: 알렉산드리아교회 장로의 불경한 주장
니케아 공의회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알렉산드리아교회 장로였던 아리우스(Arius, 250?~336)가 촉발시킨 ‘아리우스 논쟁(Arius Controversy)’이었다. 아리우스는 당대 저명한 신학자 안디옥의 루시안(Lucian)의 제자로서 한 교회를 이끌 정도로 설교와 신학에 능통했는데, 4세기 초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교회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논리를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늘 긴장 속에 놓여 있었다. 그런 와중에 열정적이고 달변가인 데다 금욕주의적인 생활로 추종자가 많았던 아리우스가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아리우스는 음악이 가진 장점을 이용해 그의 사상을 따라 부르기 쉽게 단조로운 음률로 만들어 퍼뜨렸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리아교회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아리우스는 갈등을 겪었다.
알렉산더 감독은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에서 두 차례에 걸쳐 회의를 열어 아리우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파면했다. 아리우스는 이 같은 처분에 격노해 인근의 감독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자신이 동부 지방의 감독들과 동일한 교리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다고 적었다.
많은 감독들이 아리우스의 술책에 넘어가 그를 옹호하며 복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특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적극적으로 아리우스를 두둔했다. 니케아, 칼케돈, 에베소 감독도 아리우스를 지지했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를 비롯해 시리아의 여러 감독들은 알렉산더 감독 편에 섰다. 아리우스파와 알렉산더파 간의 논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끼어들었다. 황제는 324년 9월, 코르도바의 호시우스(Hosius) 감독을 알렉산드리아에 파견해 중재를 시도했다. 결국 실패로 끝나자 호시우스는 황제에게 논쟁의 수습을 위해 회의를 요청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로마 황제의 정치 전략
325년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공동 황제였던 리키니우스(Valerius Licinianus Licinius, 재위: 308~324)를 무찌르고 로마를 재통일하는 데 성공한 후 명실공히 로마제국의 단독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로마를 안정적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밀라노 칙령(313년)과 일요일 휴업령(321년) 등 제국의 통합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 논쟁으로 시끄러워지자 호시우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의회를 소집했다. 단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예수가 하나님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통일과 통합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백성들이 다투고 분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모든 감독들을 소아시아 북쪽 니케아라는 작은 도시로 불러 모았다.”
《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 티모시 존스, 규장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과 서방 교회의 감독들에게 일제히 공의회에 관한 안내장을 보냈다. 개회일은 5월 20일(혹은 6월 19일), 장소는 니케아에 있는 황제의 별궁에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앙카라(Ankara)로 정했다가 황제의 거처에서도 멀고 내륙에 위치해 감독들이 모이는 데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니케아로 변경했다. 감독들은 장로 2명과 수행원 3명을 대동할 수 있었고, 숙식 등의 체류 비용은 황실에서 부담했다. 참석자 수는 여러 설이 있으나 약 3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제는 회의에 불참하는 경우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밀라노 칙령 후 교회의 최고 지도자를 자처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의장 자격으로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다. 그는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장했다. 황제가 입장하자 참석자들이 모두 일어서서 그를 맞았다. 황제는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옷을 차려입고 양편으로 나누어 앉은 참석자들 사이에 마련된 황금 의자에 앉았다. 뒤이어 참석자들이 착석했다. 황제는 개회사로 공의회의 시작을 알리며 종교적 평화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연설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다룬 주요 의제는 삼위일체론에 반하는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킨 ‘아리우스 논쟁’, 유월절 성찬 날짜에 관한 동∙서방 교회 감독들 간의 ‘파스카(유월절) 논쟁’이었다. 이 외에도 교회 조직, 성직자의 직위와 의무, 분열을 일으킨 자와 이단자들에 대한 재입교, 예배 의식 등에 대해 다루었다.
공의회는 5월 20일부터 7월 29일(혹은 6월 19일부터 8월 25일)까지 두 달에 걸쳐 이루어졌다. 공의회 기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등극 2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에 감독들을 초대해 호화로운 만찬을 베풀고 푸짐한 선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결과와 폐단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당시 제국의 수도에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교권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교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주요 의제였던 성찬식 날짜 문제와 아리우스 논쟁을 로마교회의 목소리를 반영해 종결 지은 것이다.
유월절은 지우고 부활절 날짜는 변경
파스카 논쟁의 쟁점이었던 성찬식 날짜는 로마교회에서 변경한 관습을 따르기로 마무리되었다. 세속의 권력자가 개입해 하나님의 가르침이 수정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와 관련해 몇 가지 기준을 정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날에 축일을 거행할 것, (유월절을 유대인들의 관습으로 오해하여) 구원자를 죽인 유대인의 관습을 더 이상 따르지 말고 로마, 이탈리아 등지에서 행하는 관습을 따를 것, 부활절 날짜는 춘분 후 만월 다음 일요일로 확정할 것’을 요구했다.
성경에는 엄연히 유월절과 부활절 날짜가 명시되어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부활절은 유월절에 이어지는 무교절 후에 오는 첫 일요일이다. 그런데도 부활절 날짜를 다시 정한 이유는 유월절을 무시하니 기준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춘분 후 만월 다음 일요일’이라는 새로운 날짜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렇게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 유월절 저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유언이자 간절한 부탁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은 세속의 권력자, 그리고 그와 손잡은 교회에 의해 파기되고 말았다.
321년 일요일 휴업령으로 안식일(토요일)이 퇴색된 데 이어 이제는 죄 사함과 영생이 약속된 하나님의 절기 유월절마저 교회 달력에서 지워졌다. 이후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승에 따라 니산(성력 1월) 14일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당했다. 어느덧 유월절은 무교절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부활절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음이 아니었다. 부활절을 산정하는 기준도 변경되었고 부활절의 풍습도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세상의 인정 혹은 용인을 반겼다. 그 결과로 나타난 뚜렷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 세상의 제도와 동일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교회의 제도적 측면이 지나치게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복음은 상대적으로 흐려지게 되었다.”
《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 티모시 존스, 규장
오늘날까지 많은 역사가들과 신학자들은 파스카 논쟁을 부활절 날짜에 관한 논쟁으로 보고 ‘부활절 논쟁’이라 정의하고 있다. 로마교회의 주장에 편중된 표현으로, ‘유월절’을 뜻하는 헬라어 ‘파스카(πασχα)’가 부활절로 오용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어 Pâques, 스페인어 Pascua, 라틴어 Pascha가 그 예다.
아리우스파 이단 규정과 추방
아리우스 논쟁은 아리우스파의 이단 규정과 추방으로 일단락되었다. 공의회 참석자들은 20여 명의 아리우스파와 나머지 다수의 알렉산더파로 나뉘어졌다. 감독들 간에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아리우스파에 대항하던 한 감독은 아리우스의 문서를 찢어버렸고, 대부분의 감독들은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감독이 아리우스설을 반박하는 내용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자고 제안했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신조 초안을 작성해 제출했다. 이후 수정 작업을 거쳐 삼위일체 개념을 정리한 니케아신조(Nicene Creed, 니케아신경, 니체노신경)가 만들어졌다. 니케아신조는 모호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회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신앙고백문이다. 다음은 니케아신조의 전문이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는 전능하시고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입니다.
우리는 한 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시며, 빛에서 나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와 한 존재이십니다. 그를 통하여 모든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습니다.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음을 당하시고 장사지내셨습니다. 그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올라가셨으며,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의 왕국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주, 성령을 믿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받고 영광을 받습니다. 그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위한 한 번의 세례를 인정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대합니다. 아멘.
〈니케아 신조〉

의장은 니케아신조를 낭독한 후 토론을 종결하고자 참석자들에게 서명할 것을 종용했다. 아리우스를 두둔했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이 문서에 동의하지 않는 자는 처벌한다’는 마지막 문구를 지우고 서명했다. 17명의 참석자가 니케아신조에 반대했다. 그러나 15명의 감독은 황제의 처벌이 두려워 동의했다.
참석자들은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던 2명의 감독 마르마리카의 테오나스(Theonas)와 프톨레마이스의 세쿤두스(Secundus)를 입회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아리우스와 그들을 파문하고 일리리아로 추방시켰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아리우스파는 황제를 두려워하여 한동안 잠잠히 지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마음을 바꿔 아리우스를 복권했다. 그 누구도 감히 황제에게 항의하지 못했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나섰다. 황제는 그를 반역죄 혐의를 씌워 추방해버렸다.
336년 아리우스가 죽은 후에도 아리우스의 사상은 널리 확산되었다.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하는 황제들에 의해 니케아신조를 따르는 자들이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들의 세력 다툼은 니케아신조를 고수한 자들, 가톨릭의 승리로 끝났다. 381년 가톨릭을 국교화한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Ⅰ)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열어 아리우스주의를 금지시킨 것이다.
이후 아리우스주의는 제국 내에서는 쇠퇴하였지만 당시 로마제국의 영토(서유럽)로 대거 이주해 정착했던 게르만 민족 사이에서는 성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527년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야망을 품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Ⅰ)가 동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교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해 교황을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선언하고 아리우스파와 이교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아리우스주의를 따랐던 게르만족 중 반달족, 동고트족이 숙청당하자 나머지 게르만족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후 16세기 폴란드의 소치니파(Socinianism)가 아리우스주의와 유사한 주장을 하다가 이단으로 몰렸다. 19세기에 창설된 여호와의증인(Jehovah’s Witnesses)도 아리우스주의의 한 형태로 보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불경한 주장에 맞서 삼위일체 개념을 정리해보고자 시도한 결과물이 오늘날 많은 기독교회가 채택한 니케아신조다. 하지만 니케아 신조의 성삼위일체 개념도 성경에 합치된 사상은 아니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의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성경적 관점의 삼위일체론은 ‘성삼위일체’, ‘성경 속 성삼위일체 하나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참고 자료]
1. 하나님의 교회 공식 사이트 《하나님의 교회 지식사전》
2.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3. 《교부들의 신학사상》, 조병하, 그리심
4. 《간추린 교회사》, 이종기, 세종문화사
5. The Nicene Creed, The Online Book of Common Prayer
6.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은성
7.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8. 《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 티모시 존스, 규장
9. 하나님의 교회 공식 사이트 《그리스도 안상홍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