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칙령 | 로마 황제의 달콤한 포퓰리즘 정책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를 위한 정책이었을까?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은 서기 313년 로마제국 황제가 밀라노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내용을 담아 발표한 포고령이다.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밀라노 칙령 뜻

밀라노 칙령은 서기 313년 로마제국의 사분(四分) 통치 시대 서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재위: 306~337)와 동로마의 황제 리키니우스(Valerius Licinianus Licinius, 재위: 308~324)가 메디올라눔(Mediolánum, 오늘날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회담한 후 각 지역 총독들에게 공문을 통해 발표한 포고령이다. 칙령(勅令, Edict, Imperial order, Royal order)이란 왕이 내린 명령을 뜻한다.

밀라노 칙령의 골자는 로마제국 내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그동안 박해당했던 기독교인에게 교회를 조직할 권리를 보장하고 몰수한 재산을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밀라노 칙령의 원문은 남아 있지 않고 현존하는 사본은 리키니우스가 동로마 지역의 총독들에게 하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키니우스는 통치 말기 콘스탄티누스 1세와의 약속을 어기고 기독교를 다시 탄압했다.

밀라노 칙령 배경

초대교회 사도들에 의해 소아시아와 로마까지 복음이 전파되면서 로마제국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하층민 신자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중류층, 귀족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당시 로마제국 내에 성행하던 미트라교는 이제 신흥종교였던 기독교와 경쟁하게 되었다. 미트라교는 태양신 미트라(Mithra)를 신봉하는 종교로 일요일(Sunday)을 성일로, 12월 25일을 미트라의 탄생일로 여겼다.

로마의 통치자들에게는 제국과 황제, 로마의 신들에 대한 충성심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황제가 최고 수장인 로마의 종교를 배척하며 하나님만 섬기는 기독교는 제국에 위협적인 종교로 치부되었다. 황제들은 기독교를 불법으로 규정해 기독교인들을 투옥하고 잔인하게 고문하고 처형했다.

기독교인을 처벌할 법적 근거는 종종 모호했지만 로마 당국은 항간에 떠도는 루머를 가지고 혐오를 조장하며 박해를 합법화했다. 기독교인이 식인 집단이며, 근친상간을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유월절 성찬과 서로 형제자매라 부르며 하나님 안에서 우애가 깊은 것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64년 네로 시대부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약 250년간 이어졌다. 사실상 기독교 박해는 유대교, 이교도, 일반 대중들까지 가세해 끊임없이 발생되었다. 막강한 권력을 이용한 황제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10대 박해는 다음과 같다.

〈네로의 횃불(Nero’s torches)〉, 폴란드의 화가 헨리크 시에미라츠키(Henryk Siemiradzki).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1. 64~68년 네로(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는 64년 7월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기독교인을 방화범으로 몰아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를 풀어 처형하거나 야외 연회장을 밝히는 횃불로 삼는 등 잔혹하게 처형했다.
  2. 90~96년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는 기독교인 때문에 신들이 노했다는 이유로 탄압했다.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카타콤(지하 무덤)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당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3. 98~117년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janus)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을 중죄인으로 규정했다.
  4. 117~138년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는 70년 로마의 공격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가하는 대신 황제 숭배, 토라(모세오경) 사용 금지, 안식일 예배 금지 세 가지 조건을 걸었다. 이를 거부하자 가차없이 처형하고, 기독교인을 비호한 사람도 처벌했다.
  5. 161~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는 전염병이나 가뭄 등 자연재해의 원인을 기독교인에게 돌려 처형하고, 기독교인의 시신을 개들에게 먹이로 주기도 했다. 소아시아의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카르포스(Polycarpos)가 이때 순교했다.
  6. 202~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Lucius Septimius Severus Pertinax)는 로마의 태양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한편, 개종 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렸다.
  7. 235~236년 막시미누스(Gaius Julius Verus Maximiuns Thrax)는 전임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박해했는데, 특히 교회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8. 249~251년 데키우스(Decius Gaius Messius Quintus Trajanus)는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와 의례를 회복하는 데 주력하고 로마 종교의 신들에게 제사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불복하는 사람은 칙령을 거부한 혐의로 처형했다. 이 법령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쳐 데키우스 시대 많은 기독교인이 순교하거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변절했다.
  9. 259~260년 발레리아누스(Publius Licinius Valerianus)는 기독교의 집회를 금지시키고 교회와 기독교인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10. 303~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는 가장 혹독하고 조직적인 박해를 가했던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로마를 동서로 나누고 사분 통치 체제를 시행해 2명의 공동 황제와 2명의 부황제를 두어 제국을 다스렸다. 당시 그의 사위이자 동로마의 부황제였던 갈레리우스(Valerius Maximianus Galerius)는 자신의 궁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기독교인이 방화범이라고 주장했다. 갈레리우스의 선동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년 3월, 기독교를 뿌리뽑기 위한 칙령을 연달아 하달했다. 예배가 금지되는 것은 물론 교회는 파괴되었고, 성경은 불태워졌다. 기독교인 공직자들은 공직에서 쫓겨났다. 교회 지도자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체포되었고, 로마의 요구에 따르지 않을 경우 온갖 고문을 당하며 죽어갔다.

그들은 날카로운 칼로 그리스도인들의 손가락을 난도질했고, 쇠를 녹인 물을 그들의 머리와 하체에 부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산 채로 창자를 뽑히는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고문이 얼마나 잔혹하고 기괴한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재판관들은 더 이상 새로운 고문 방법을 고안할 수 없게 되자 마구잡이로 우리의 눈을 뽑고 사지를 절단했다.

로마인들의 고문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증언, 《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 티모시 존스, 규장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 시대 가해졌던 박해는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기까지 계속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뒤를 이어 동로마의 황제 자리에 오른 갈레리우스는 중병에 걸리자 기독교의 신이 보복한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아무리 가혹한 박해를 가해도 기독교를 박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11년, 갈레리우스는 당시 부황제였던 리키니우스와 서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와 함께 기독교에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세르디카(오늘날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내린 칙령이라 하여 ‘세르디카 칙령(Edict of Serdica)’이라 부른다. 칙서에는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황제와 제국의 안전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요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며칠 후 사망했다. 이후로도 기독교를 향한 탄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2년 후 로마제국의 공동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는 밀라노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후 회담을 통해 합의한 대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합법화하되 이전의 교회와 기독교인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법령을 백지화하고 그동안 몰수했던 재산을 반환한다는 내용을 담은 칙령을 내렸다. 313년 2월의 일이었다.

밀라노 칙령을 작성한 사건을 기념해 1978년 제작된 명판, 이탈리아의 밀라노 산 조르조 알 팔라초 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 Giovanni Dall’Orto 作,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 후 이교의 사제들이 누리고 있던 권리를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도 부여해 납세와 병역 의무를 면제해주고, 사법적 재판을 받지 않게 하는 등 각종 특혜를 주었다. 교회 설립을 지원하고, 각 지방의 총독들에게 공문을 보내 기독교인의 포교를 방해하지 말라고도 지시했다.

태양신을 믿었던 그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파격적으로 우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로마제국은 내전과 외부로부터의 위협으로 정국이 불안했고, 종교적으로도 갈등과 분열로 어지러웠다. 그는 제국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안정되고 효율적으로 통치하기를 원했다. 그 정치적 도구로 기독교를 이용했던 것이다.

당시 기독교는 오랜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로마제국 내에서 무시하지 못할 종교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인구의 20%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정치적 목적 외에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 헬레나 아우구스타(Helena Augusta)의 영향과 전임 황제였던 갈레리우스가 기독교인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유언을 남겼다고도 전해진다.

무엇보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하나님과 태양신을 동일시했다고 한다.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하려고 태양신을 숭배하는 미트라교의 축일(Sunday)에 예배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권력을 위해 장인과 처남, 매제를 죽일 만큼 폭력적이었지만 영민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종교 관용 정책과 기독교인에 대한 복지 정책 등 이를테면 포퓰리즘(Populism, 대중영합주의)으로 제국의 정세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의 종교 정책이 미트라교와 기독교 세력을 통합하여 제국에 충성할 지지 기반으로 삼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실제로 그는 죽을 때까지 로마 종교계의 최고 사제직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를 고수했고, 마지막까지 세례를 미뤘다.

밀라노 칙령 전문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종교의 자유를 부인해서는 안 되며, 각 사람에게 자신의 결정에 따라 거룩한 의무를 수행할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백성들과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선택한 종교와 독특한 예배 방법을 준수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었다. 그 칙령(세르디카 칙령)은 많은 분파들에게 이러한 특권을 부여하였는데, 그중 어떤 분파들은 얼마 후 이런 종류의 배려와 의식을 행하지 않고 움츠러들었다.

그러므로 나 콘스탄틴 아우구스투스(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시니우스 아우구스투스(리키니우스)는 좋은 전조 아래 밀라노로 와서 공익 및 복지와 관련된 일들을 고려하면서, 무엇보다 이 일들이 모든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일에 대한 것을 먼저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기독교인과 모든 백성들에게 자유 의지에 따라 원하는 신앙 양식을 좇을 것을 허락한다. 우리 및 우리의 통치 아래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어떤 신이나 거룩한 존재들이라도 호의를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하고 올바른 의도를 갖고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관습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뜻을 명령하는 바이다. 각 사람이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신앙에 자신의 마음을 바칠 권리를 허락한다. 그러면 그 신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자신의 은총과 자비를 나타내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임을 기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에 우리가 당신들에게 보냈던 서신에 기록되었던 기독교인에 관한 반대 조항, 그리고 우리의 온유함에 반대되는 조처들은 완전히 제거되고 무효화되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괴롭힘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자신이 선택한 예배와 진로를 추구하고 좇을 수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자기들의 예배 양식을 따르는 자유를 허락했음을 당신이 깨닫게 하기 위해, 이 사실을 당신에게 전하여 당신의 보호와 배려에 맡기기로 결심했다.

기독교인들에게 허락한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므로 그들도 각기 원하는 예배와 신앙을 택할 수 있다. 각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드는 신을 선택하여 예배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은 우리 시대의 평화와 안정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종교나 예배 양식을 훼손할 의도로 이러한 조처를 내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독교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즉, 이미 당신에게 서신을 보낸 바와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과거에 기독교인들이 모이던 장소를 다른 사람이나 국가로부터 사들였다면 아무런 대가나 돈을 받지 말고 지체하지 말고 돌려주어야 한다. 혹시 이런 처소를 선물로 받은 사람이 있다면 즉시 그것을 기독교인들에게 반환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 처소를 구입하였었거나 선물로 받았던 사람들이 정부에 요구할 것이 있다면 지방 총독에게 재판을 청구하라. 그러면 우리는 관대하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것이다. 당신은 책임지고 이 모든 것들을 지체하지 말고 기독교인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집회처 외에도 개인의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 전체의 소유인 다른 처소들을 소유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앞서 언급된 법에 따라 지체하지 말고 기독교인들 집단과 각 비밀 집회소의 소유였던 것들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하라. 대가를 받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 재산을 돌려준 사람들에 대해서는 국가가 보상하라. 기독교인들에게 우리의 명령을 신속하게 실시하고, 또 이렇게 하는 데 있어서 보편적이고 공적인 안정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국고에서 공급하는 책임을 지라.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많은 일 속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이 같은 우리의 관용과 명령을 문서로 기록하여 공포하여 모든 사람에게 알리며, 그리하여 이 같은 우리의 관용과 자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라.

밀라노 칙령의 영향

밀라노 칙령은 로마제국의 모든 시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법령이었다. 이로써 오랫동안 박해당했던 기독교인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지원을 받아 교회가 설립되었고, 출세를 위해 기독교에 입교하거나 성직자가 되는 자들이 늘어났다.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제국 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로마교회 지도자들은 정치권력과 손잡고 점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 지 8년 후인 321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미트라교의 축일이었던 일요일을 준수하라는 칙령을 내리며 그날을 ‘존엄한 태양의 날(Sunday)’이라고 칭했다. 274년 군인 황제 아우렐리아누스(Lucius Domitius Aurelianus)는 미트라교를 로마의 국교로 제정했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는 미트라교의 축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것이다. 당시 로마의 대다수 시민들이 미트라교도였고, 로마교회의 기독교인들도 일요일에 예배하고 있음을 감안한 정책이었다. 아시아 교회는 초대교회의 전통을 따라 일곱째 날(토요일)에 안식일을 지켜오고 있었으나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태양신 미트라가 황소를 죽이는 모습을 묘사한 부조.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기독교는 사도시대 이후부터 다양한 신학적 논제와 교리를 놓고 끊임없이 다투고 있었다. 유월절 성찬 날짜를 두고 아시아 교회와 로마 교회 간에 벌인 ‘파스카(유월절) 논쟁’은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였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Arius)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며 벌어진 ‘아리우스설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개입했다. 325년 최초의 종교회의였던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콘스탄틴은 예수가 하나님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통일과 통합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백성들이 다투고 분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모든 감독들을 소아시아 북쪽 니케아라는 작은 도시로 불러 모았다.

《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 티모시 존스, 규장

기독교 교리에는 무관심했던 황제는 로마교회 지도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회의를 마친 후 아리우스와 그를 따르던 2명의 교부는 성직 박탈과 함께 출교되었고, 이 회의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이단으로 간주되어 군사력을 동원해 진압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니산(성력 1월) 14일 유월절에 성찬식을 기념하는 자들은 ‘이단’, ‘십사일파’라고 불리며 박해를 당했다. 안식일에 이어 유월절마저 교회 달력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후 교회는 로마 황제의 지휘 아래 운영되었다. 정교 유착은 기독교에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교회 달력에는 태양신 미트라의 축일(Sunday)에 이어 미트라의 탄생일(12월 25일)까지 추가되었다. 교회 내부는 태양신 사상으로 붉게 물들었고, 예배 의식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이방 종교의 풍습들로 채워졌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후원하면서 한편으로 교회의 문제에 대해 최고 권위를 가진 자로 자처했다. …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위치를 교회의 머리로 분명하게 드러냈다. 교회의 감독들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감독 중의 감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동시에 자기 아버지가 믿었던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를 섬겼다. 기독교 공인 후에도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미트라 신을 조각하고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써넣었다. 그의 영향으로 미트라 신앙의 의식이나 제도, 관습, 교리 등이 초기 기독교에 대부분 수용되었다.

《세 종교 이야기》, 홍익희, 행성B

기독교회는 많은 이방 사상과 상징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태양 숭배로부터 예수의 탄생일이 태양제의 날인 12월 25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태양 숭배에 참여했는데 … 기독교화된 몇몇 이교적 풍습들, 예를 들면 초나 향, 화관 같은 것을 사용하는 풍습 같은 것은 이방 종교를 상징한다고 해서 초기에는 교회 내에서 금했었다.

《교회사 핸드북》, 라이온사 편, 송광택 역, 생명의말씀사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에 승리를 가져온 것처럼 보였다. 수백 년간 로마의 폭력에 시달리던 교회로서는 신앙의 자유와 함께 후하게 대접하는 황제와 제국이 존경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대신 황제의 정치적 고삐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초대교회의 전통을 버리고 태양신 숭배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시대의 흐름에 편승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이 같은 변절을 유죄라고 경고하셨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오 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강포로 이 땅에 채우고 또다시 내 노를 격동하고 심지어 나무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아껴보지 아니하고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에스겔 8:15~18)

밀라노 칙령이 내려진 후 기독교는 제국의 든든한 지원을 받게 된 데 이어 392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the Great) 황제에 의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채택되었다. 이제 로마를 주축으로 한 기독교(로마가톨릭교회)는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로 탈바꿈했다.

[참고 자료]
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은성
3. Fourth-Century Christianity, Wisconsin Lutheran College
4. 《인명사전》, 인명사전편찬위원회, 민중서관
5. [오늘의 경제소사] 콘스탄티누스 3대의 골육상쟁, 《서울경제》, 2020. 9. 8.
6. 하나님의 교회 대표 사이트 《WATV
7. 하나님의 교회 공식 사이트 《그리스도 안상홍님
8. 하나님의 교회 공식 사이트 《하나님의 교회 지식사전
9. 《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 티모시 존스, 규장
10. 《세 종교 이야기》, 홍익희, 행성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