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 초대교회 신앙으로 돌아가자

500년 전 종교개혁이 미완에 그친 이유는?

종교개혁(宗敎改革, Reformation)은 중세 유럽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성직자의 도덕적 해이,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교리 등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일으킨 개혁운동을 가리킨다. 12세기부터 국지적으로 변화를 촉구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어닥친 것은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교황청의 면죄부(면벌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일이 기폭제가 되었다.

종교개혁 역사 개요

종교개혁 역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종교개혁을 주도하며 반가톨릭, 탈가톨릭을 외친 개혁자들은 나름의 신앙 사조를 퍼뜨리기도 했다. 이른바 ‘5대 강령(Five Solas)’이 그것이다.
① 오직 성경(Sola Scriptura)
②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③ 오직 믿음(Sola Fide)
④ 오직 은혜(Sola Gratia)
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종교개혁의 원인과 배경

종교 암흑시대

기독교는 2천 년 전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신흥종교였던 초대교회는 유대교로부터 이단으로 치부되었고, 황제 숭배와 태양신, 다신교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천국을 소망하며 구원을 바라는 성도들에 의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음, 새 언약의 진리는 소아시아와 그리스, 로마에까지 퍼졌다.

교회의 변절은 구원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2세기 초, 로마교회(오늘날의 로마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이 전해주신 구원의 진리를 버리고 변주를 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핍박을 모면하고자 로마인들의 다신교 문화를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교회가 안식일(일곱째 날로 칠요일 제도상 토요일)을 버린 것은 2세기 초의 일이었다. 로마교회는 당시 제국 내에서 성행했던 태양신 미트라(Mithra)를 숭배하는 미트라교의 예배일인 일요일(Sunday)을 지키기 시작했다. 로마교회는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하셨다는 명분을 들어 일요일 예배를 합리화했다.

미트라와 황소, 이탈리아 마리노의 미트라신전 프레스코화(3세기경).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로마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던 교회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동방의 교회들은 안식일을 고수했다. 이후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1년 일요일 휴업령을 내리면서 일요일 예배가 법제화되었고, 결국 안식일을 지켜오던 동방 교회들도 이에 굴복하고 말았다.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성찬)로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날로, 죄 사함과 영생이 약속된 소중한 진리다. 유월절이 변질되기 시작한 건 2세기 중엽이다. 로마교회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에 성찬을 행했다. 이로 인해 동∙서방 교회 감독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파스카(유월절) 논쟁’이라 한다.

동방 교회의 감독들은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 유월절(성력 정월 14일 저녁)에 성찬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로마교회 감독(오늘날의 교황)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도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을 비정통으로 간주하였다. 성찬식 날짜 논쟁은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개입으로 종결되었다. 로마교회의 주장대로 부활절에 성찬을 하되 성경에 명시된 부활절 날짜가 아닌 ‘춘분 후 만월(보름) 다음에 오는 첫 일요일’로 정해진 것이다. 이후 유월절을 지키는 자들은 일명 ‘십사일파’라 불리며 이단으로 몰렸고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로마교회는 종교 관용 정책을 펼쳤던 콘스탄티누스 1세 때부터 그리스 철학사상과 함께 이교 문화를 급격하게 받아들였다. 4세기 초 고대 바벨론의 신 담무스(Tammuz, 탐무즈) 숭배 사상에서 기인한 이교의 상징이자 제국 내 사형틀로 사용하던 십자가를 기독교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해 431년경에는 교회 내부에, 568년경에는 교회 첨탑에 세웠다. 354년 로마교회 감독 리베리우스 시대에는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일인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정해 교회의 절기로 지키기 시작했다. 431년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하며 마리아 숭배를 공식화했다.

로마교회가 다신교와 태양신 숭배 사상에서 도입한 일요일, 크리스마스 등 불법이 만연해지면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키고자 했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더욱 거세졌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산속이나 사막으로 흩어졌고, 카타콤(지하 묘지)으로도 숨어들어갔다. 그러나 그 명맥을 오래 이어가지는 못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차려진 교회의 권력은 이제 로마교회 차지가 되었다. 4세기 말 로마제국으로 대거 이주한 게르만족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로마교회는 유럽 전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종교 암흑시대는 하나님의 진리가 변개되고 이교 문화가 교회에 자리잡는 한편 성도들이 박해당하던 시기로, 로마교회가 권세를 거머쥐기 시작해 교황 피우스 6세(Pius Ⅵ, 비오 6세)가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의 군대에 의해 쫓겨난 때를 가리킨다. 이는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다니엘 7:25, 요한계시록 13:4~7).

부패한 교회와 성직자

로마교회는 세속의 권력자들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천년이 넘는 세월 속에 교회 안에는 켜켜이 부패와 타락의 먼지들이 쌓여갔다. 성직자들은 부정했고 부도덕했다. 음행, 성직 매매 등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성직자들의 물질주의는 돈을 주고 사면 죄가 사해진다는 종잇조각을 고안해내기에 이르렀다. 면죄부, 면벌부, 속죄부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증서는 800년경 교황 레오 3세(Leo III) 때 처음으로 판매되기 시작해, 15세기에 이르러 급격하게 판매량이 늘었다. 교황 레오 10세(Leo X) 때 성베드로성당 건축 비용을 마련할 명목으로 도미니크수도회 소속 사제들이 유럽 전역을 돌며 판매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면죄부, 면벌부, 속죄부라는 이름으로 불린 증서를 판매했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주신 성경을, 평신도는 감히 넘보면 안 될 금서로 지정하는가 하면, 미사를 신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로 집전하기도 했다. 로마교회의 사상이나 명령에 반하는 행위를 한 신도는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나님보다 세속에 눈이 먼 성직자들의 행태는 참된 신앙과 동떨어져 있었다.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한 교리와 사상,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교회, 불경한 그들의 모습은 결국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고, 신도들의 신앙심을 농락하는 것이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던 종교개혁자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개혁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종교개혁의 서막: 미완의 개혁운동

종교개혁 인물

피터 왈도(페트루스 발데스)는 프랑스 리옹의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가톨릭 사제로 고용되어 성경을 번역하던 중 성경 중심의 신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특히 라틴어 성경을 일반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여 무상으로 배포했는데, 이는 성경을 독점하고 있던 교회와 성직자들의 불만을 샀다.

피터 왈도는 리옹에서 추방되어 그의 추종자들과 단체를 조직해 프랑스를 돌며 전도를 이어갔다. 그 단체는 왈도의 이름을 따서 ‘왈도파(Waldeneses)’ 혹은 ‘왈도파 사람들(Waldensians)’이라고 불린다. 왈도의 사상은 프랑스 북부,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까지 확산되었는데, 로마교회는 왈도파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화형에 처하는 등 극심한 박해를 가했다.

존 위클리프는 영국의 신학자로, 옥스포드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고, 왕실과도 깊은 관계를 맺는 등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로마교회의 축재와 성직자들의 권위주의, 세속적인 생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타락한 성직자들의 소유를 몰수하는 정부의 정책을 지지한 일로, 교황과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단 혐의에 대해 변론하기 위해 세인트 폴 대성당 성직자들 앞에 나타난 존 위클리프, 영국의 작가 존 캐셀(John Cassell) 作.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위클리프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로, 평신도들도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하며 성물 숭배, 성지 순례가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교회 당국은 그를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려고 했으나 내부 분쟁으로 철회했다. 그러나 그가 자연사한 후 유골을 파내어 화형에 처했다고 한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얀 후스 등 개혁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얀 후스는 체코 프라하대학의 교수로, 위클리프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아 성직자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고 성경에 입각한 신앙의 중요성을 전파했다.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로마교회는 후스에게 주장을 철회하도록 명령했으나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의와 설교를 이어갔다.

1411년, 피사의 교황(당시 교회청 대분열로 3명의 교황(로마, 아비뇽, 피사)이 대립하고 있었다.)은 후스를 파문했으나 그는 영장을 불태워버렸다. 이후 교황은 후스에게 콘스탄츠공의회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후스는 출두 명령을 거부하다가 신변보호를 약속받고 응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화형당했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직을 겸하며 사제로 일하던 중, 당시 가톨릭교도라면 누구나 가보고 싶어하는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게 되었다. 루터는 로마에서 추기경의 호화로운 저택, 교황의 사생아들, 사제들의 타락상을 목격한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베드로성당의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사령(교황이 특별히 죄를 용서해주는 큰 명령)이라 불리는 ‘면죄부’를 대량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살인죄, 간음죄, 아니 그 이상의 큰 죄라도 그것을 구입한 사람은 물론, 이미 지옥에서 고통받는 친척도 금화가 ‘쨍그랑’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동시에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말로 신도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인간의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루터는 죽음을 각오하고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와 비리를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교회 정문에 붙였다. 교황은 루터에게 그가 말한 것을 취소할 것을 명령했지만 응하지 않자 결국 그를 파문했다.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는 마르틴 루터, 벨기에 출신의 화가 페르난디드 포웰스(Ferdinand Pauwels) 作.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마르틴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외쳤는데, 루터의 사상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빠르게 확산됐다. 많은 사람이 가톨릭에서 나와 루터를 지지했다. 루터는 종교개혁에 가장 큰 바람을 일으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츠빙글리는 스위스의 가톨릭 사제 출신으로 루터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교황의 용병부대 종군 신부로 일하다 용병 제도에 대해 지적하고 물러난 후 면죄부와 교황청의 비리를 비판하는 설교자로 유명해졌다. 그는 사순절 단식, 연옥, 성상 등을 배격하고 성직자의 결혼을 주장하며 주정부의 승인을 얻는 한편, 자신도 과부와 결혼했다.

츠빙글리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과감히 바꾸었다. 수난주간 미사를 폐지하고, 예배는 독일어를 사용해 집전했으며 가톨릭의 예전과 예식을 대부분 폐지했다. 그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주(州)와 그의 개혁을 지지하는 주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전사했다.

프랑스 출신 신학자인 칼뱅은 루터의 영향을 받아 개혁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친분이 있던 파리 대학 학장에게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 가톨릭에서 사망한 후 성인(聖人)으로 선포된 자들을 기념하는 날) 기념사를 대필한 일로 수배령이 내려져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기념사가 신교 사상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Francis I)는 신교도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화형에 처했다.

프랑스 국왕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망명한 칼뱅은 개신교의 사상이 부도덕하거나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해명하는 책을 써서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했다. 그 책이 바로 개신교의 기본 정신과 교리를 설명한 《기독교 강요》다. 그는 말년까지 성경 중심의 신앙을 고수하며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이론을 체계화하고 정립하는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칼뱅은 마르틴 루터보다 더 철저한 성서주의를 외쳤다. 그는 루터가 주창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에 두 가지를 더 강조했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인데, 이는 종교개혁의 기치인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이 되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에 불을 지폈다면, 칼뱅은 개혁운동의 불꽃이 더욱 타오르게 했다.

종교개혁가 장 칼뱅(Jean Calvin)의 초상화, 16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작품.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종교개혁의 산물, 교파의 난립

중세 유럽을 뒤흔들며 기독교에 거대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종교개혁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종교와 정치 권력을 쥐고 있던 교황청을 상대로 “오직 성경대로”, “초대교회 신앙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개혁자마다 사상과 견해가 달라 하나로 뭉치지는 못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연대하여 개혁운동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성찬에 대한 이견으로 격렬한 논쟁 끝에 갈라섰다. 반가톨릭, 탈가톨릭을 외친 종교개혁은 다양한 교파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가톨릭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다른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며 저마다 우후죽순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세계기독교인통계에 따르면 2024년 1월을 기준으로 전 세계 기독교 교파는 47,100개에 이른다. 기독교는 종교 암흑시대에 벌어진 종교개혁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갈래로 분파되었다. 루터파의 루터교회와 칼뱅파의 장로교를 비롯해 침례교, 성결교, 오순절교회, 영국 국왕 헨리 8세(Henry VIII)가 결혼 문제로 가톨릭과 결별한 후 세운 영국국교회, 성공회, 감리교, 구세군, 동방정교회, 콥트교회 등 무수한 교파가 난립해 있다.

개신교는 성경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며 가톨릭의 비성경적인 교리와 사상을 반대한 데서 출발했다. 하지만 사도시대 이후 가톨릭에서 도입한 일요일 예배, 크리스마스, 십자가 숭배 사상은 그대로 답습하여 지키고 있다. 그중 일요일 예배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성서에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로 명시되어 있으니 성교회(가톨릭교회)로가 아니라 성서에서부터 직접 종교를 끌어 왔다고 우기는 가톨릭이 아닌 이들(개신교)도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정말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실은 개신교가 태어나기 15세기 전에 이렇게 변경된 것으로, 개신교가 탄생된 당시에는 이것이 보편적인 관습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비록 성서에 명시된 글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그들은 이 관습을 그대로 계속해오고 있다. 이것은 가톨릭이 아닌 교파들이 갈라져 나간 자모(慈母)이신 성교회의 기념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마치 집을 박차고 나가긴 하였지만 호주머니 속에 어머니의 사진이나 머리카락 한 줌을 늘 지니고 다니는 탕자처럼.

《억만인의 신앙》, 존 오브라이언, 가톨릭출판사

성경을 접하며 조금씩 각성한 개혁자들에 의해 타오른 종교개혁은 2천 년 전 순수했던 초대교회 진리를 되찾지 못한 채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독일의 화가 빌헬름 폰 카울바흐(Wilhelm von Kaulbach)의 〈종교개혁시대〉를 본떠 조각한 작품, 독일의 조각가 프리드리히 에두아르드 아이헨스(Friedrich Eduard Eichens) 作.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마지막 종교개혁: 개혁운동을 완성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던 초대교회의 신앙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구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 세상에서 온전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고 예언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8)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무리 열렬하다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도 경고하셨다(마태복음 7:21~23). 완전한 종교개혁이 필요한 이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히브리서 9:28).

종교개혁은 성경의 예언대로 오셔서 초대교회의 원형을 간직한 하나님의 교회를 다시 설립하신 재림 그리스도 안상홍님에 의해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교회의 마지막 종교개혁에 대해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16세기 루터, 칼뱅, 츠빙글리 등 종교 개혁자들도 되찾지 못한 초대교회 새 언약 유월절이 오늘날 재조명된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다. 박노균 목사는 “‘오래 저장했던 포도주로 사망을 멸하시는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성경 예언대로 새 언약 유월절을 회복하여 영생의 길을 열어주신 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 안상홍님”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회는 주간 절기 안식일, 연간으로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부활절), 칠칠절(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 등 새 언약의 7개 절기를 모두 지킨다. “초대교회가 지키지 않았던 일요일 예배, 크리스마스, 십자가 등은 이교의 관습으로 엄격히 배격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 측의 설명이다. 예배 드릴 때 남성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여성은 베일(머리수건)을 쓴다.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인생 질문에 성경으로 답하다’, 《동아일보》, 2024. 2. 26.

2017년 12월, 《월간중앙》은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점화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하나님의 교회와 성경의 진리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하나님의 교회 측은 안상홍님 강탄 100주년을 앞두고 70억 인류를 향해 메시지를 전했다. “오늘날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 사함과 구원의 축복이 담긴 새 언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진리의 개혁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없이 실천하는 진정한 믿음의 개혁도 수반되어야 하지요. 모든 만민들이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께 나아와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행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일련의 모든 내용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진리의 개혁’을 500년 전 “성서로 돌아가자”며 종교개혁을 외쳤던 루터가 발견하지 못한 마지막 퍼즐로 보고 있다. 성서 중심의 신앙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교회의 행보에 교계의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월간중앙》, 2017년 12월호 커버스토리

[관련 영상] 기독교 이단과 정통의 특징

[참고 자료]
1.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2.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3. [동에서 부는 바람, 서에서 부는 바람] 진정한 개혁은 어떤 것인가?, 《미주중앙일보》, 2017. 11. 4.
4. 하나님의 교회 대표 사이트 《WATV
5. 하나님의 교회 공식 사이트 《그리스도 안상홍님
6. 하나님의 교회 공식 사이트 《하나님의 교회 지식사전
7. 《간추린 교회사》, 이종기, 세종문화사
8. 《교회사 핸드북》, 라이온사 편, 송광택 역, 생명의말씀사
9. 《새롭게 보는 서양문화사》, 김형곤, 선인
10. 《Basic 중학생을 위한 사회 용어사전》, 임성재, 신원문화사
11. 《Basic 중학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강상원, 신원문화사
12. 《교회용어사전: 교파 및 역사》, 가스펠서브, 생명의말씀사
13. 인물세계사, 함규진, 네이버캐스트
14. 《억만인의 신앙》, 존 오브라이언(John Anthony O’Brien), 가톨릭출판사
15.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인생 질문에 성경으로 답하다, 《동아일보》, 2024. 2. 26.
16. [기획특집 • 루터 종교개혁 500년 – 하나님의 교회와 성서의 진리] 무엇을 믿고, 무엇을 실천하나, 《월간중앙》, 2017년 12월호 커버스토리